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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7 01:27

여산 송씨(礪山宋氏)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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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송씨(礪山宋氏)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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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공원에 세워진 여산송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제공

 

 

<뿌리공원에 세워진 여산송씨 유래>

 

여산 송씨는 역사상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했으며, 특히 민족이 국란(國亂)을 당할때는 충절(忠節)과 기개(氣槪)로서 민족수호에 사력을 다한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선조를 무수히 배출한 대성(大姓)이며, 선계(先系)는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인 자영(自英)이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여산(礪山)송씨의 시조인 유익(惟翊)이요, 둘째가 은진(恩津)송씨의 시조인 천익(天翊이며, 셋째인 문익(文翊)이 서산(瑞山)송씨의 시조로서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연원을 이룬 것이고, 여산 송씨의 시조인 유익(惟翊)은 고려 때 진사(進士)로 나라에 공을 세워 여산군(礪山君)에 봉(封)해져 은천광록대부추밀원부사에 추증된 공신(功臣)이며, 고려후기 원종(元宗)때 4세손 송송례(시호:貞烈公)가 왕정복고(王政復古)에 기여한 공으로 추성익대보리동덕좌명공신이란 호를 받고 여량(礪良:여산의 옛지명)부원군에 봉해진걸 계기로 본관이 여산으로 정해졌으며, 시조 유익공(惟翊公)의 묘소는 전북 익산시 여산면 문수동에 위치하여 매년 동지일(冬至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래 동지사(冬至祀)란 황실(皇室) 또는 왕실(王室)에서만 지내는 궁중의 제사(祭祀)로 일반 사대부, 평민은 지낼수 없는 예제(禮祭)이나 정렬공의 충정에 원종(元宗)이 감탄하여 정렬공의 시조묘는 동지사를 모시게 조정에서 교지를 하사(下賜)하셨고, 더욱이 평민이나 사대부의 묘는 능(陵)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 우리 조상의 예법이나 오직 정렬공의 묘만이 공의 빛나는 위업을 기려 고려 충렬왕의 교지로서 홍능(洪陵)이라는 능칭(陵稱)을 하사(下賜) 받음은 송문(宋門)의 자랑이다.

여산송씨의 세계(世系)는 6세손에 이르러 원윤공파, 밀직공파, 소윤공파, 지신공파, 정가공파 등으로 나뉘어 5파가 세도가문의 기반을 닦았으며, 조선조에 중종반정시 정국공신 3등의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내신 송질,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협조하여 국가기강 확립에 기여한 좌의정 송인명, 조선의 절신(節臣) 송상현,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전공을 세원 송여종, 송대립, 8대 문장가중 한사람 송익필, 성리학의 대가 송한필, 청백리(淸白吏) 송천희, 초·예서에 능하여 청나라 강희제의 찬탄을 받았다는 송일중, 조선의 항일운동가로서 친일파 대신의 제거와 산림개발권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항하여 보안회를 조직 극력 반대하여 철회시키는 등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한몸 불사르신 송수만,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충신과 석학들을 배출한 송문(宋門)은 우리나라의 유수한 명문(名門)이며, 계(戒) 자손(子孫) 독서수행(讀書修行)하고, 성심봉선(誠心奉先)하라는 위대한 선조들의 교훈을 받들어 송문(宋門)의 가훈으로 삼고 가문의 교훈을 널리 계승발전시키고저 여기 유래비를 세워 선조들께 바치고 후손들에게 전합니다.
 

1997.8.15 여산송씨 대전종친회

 작품명 : 결실(結實)

조각가 : 임 선 빈 (전 대전조각가협회회장)

작품설명 : 여산송씨의 후손들이 협력하여 풍성한 결실(結實)을 맺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문중이 됨과, 무궁한 번영을 기약하는 미래지향적 희망을 나타내며, 시조 유익공과 두분의 형제분을 중심의 씨알로 표현하여 생동감 있게 성장되어가는 진취적 기상을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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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중구

 

<김진우 작가의 해설>

여산송씨(礪山宋氏)

 

조선에 성리학을 말할 사람은 "송익필.송한필 형제뿐"

  • 과거급제자 357명 배출

    송언신이 관찰사때 처음으로 만든 족보(族譜)는

  • 딸의 후손도 4대까지 기록한 귀중한 문헌

  •  

    여산송씨(礪山宋氏)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 전 판도사의 으뜸 벼슬)를 지낸 송자영(宋自英: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짐)의 큰 아들 송유익(宋惟翊:여산군礪山君)을 시조로 받든다.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때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고려때 정3품 문관의 품계)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정령을 출납하던 추밀원의 정3품벼슬)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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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송유익 묘소>

    전북 익산시 여산면 문주동 구봉산 아래 호남고속도로 여산 휴게소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마을을 향해 뻗어내린 산에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시조(始祖) 송유익의 묘(墓)가 있다. 이곳은 호남의 8대명당 중 하나라고 한다. 태조산인 대둔산에서 내려온 용이 주산인 천호산(天壺山)을 만들고 그 중심맥으로 내려온 용에 자리 하고 있어 대단한 국세(局勢)라고 한다.

     

    그러나 여산송씨는 시조 송유익 이후의 세계(世系)를 실전(失傳:고적등이 대대로 전해온 사실을 어떤 이유로 알 수없게 됨),그의 후손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고려 중서문하성의 종2품벼슬)을 지낸 송숙문(宋淑文)을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여산송씨는 역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명신(名臣:이름난 신하.훌륭한 신하) 현유(賢儒)를 배출하였는데 고려 충렬왕 때 중찬(贊:고려시대의 정승으로 1275년(충렬왕 1)첨의부를 설치하면서 기존의 문하시중을 첨의중찬으로 바꾸어 좌.우에 각 1명을 둠,1308년 정승(政丞)으로 고쳤으며 이때부터 조선시대는 의정부의 삼공을 '정승'이라 칭하였다)을 지낸 송송례(宋松禮)가 명성을 떨쳤다.
     

    정승을 지낸 송송례(宋)의 아들 송 염(宋)과 송 분 형제대(代)에서

    원윤공파(派:파조는 개성원윤을 지낸 송 운).밀직공파(派:파조 송방영).소윤공파(派:파조 송원미(宋元美).지신공파(派:파조 송 인(宋璘).정가공파(派:파조 송서(宋瑞))의 5파로 분파되었다.

    원윤공파(元尹公派)의 파조 송 운, 밀직공파(密直公派)의 파조 송방영(宋邦英).소윤공파(少尹公派)의 파조 송원미(宋元美)는 송 염(宋琰)의 아들이고 <지신공파>의 파조 송 린(宋璘)과 <정가공파>의 파조(派祖) 송 서(宋瑞)는 송 분의 아들이다.

    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영의정.좌의정.우의정 정1품 벼슬을 상신이라 함) 2명(영의정1명,좌의정1명)과 왕비1명, 그리고 6조판서(判書:정2품 벼슬 장관)등의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5파 중에서도 특히 지신공파와 정가공파(正嘉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지신공파에서는 송현수(宋壽:단종의 국구)를 비롯하여 송세림(宋).송세형(宋) 형제와 송상현(宋).송상인(宋) 형제, 송성명(宋).송진명(宋) 형제 그 밖에 송인명(宋).송문재(宋) 등의 명신들이 나왔다.

  • 송현수는 단종의 국구(舅:임금의 장인)로서 단종복위운동사건 이후에도 세조의 아낌을 받았으나 금성대군()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송세림은 문장.서화에 뛰어났고 송세형은 명종 때 위사공신()으로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으뜸벼슬로 현재의 검찰총장)을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 벼슬.장관).이조판서(吏曹判書:이조는 문관의 선임과 훈봉,관원의 성적 고사와 포폄(褒貶:칭찬함과 나무람.시비선악을 평정함) 에 관한일을 맡아보았음.정2품벼슬.장관)를 역임하였다.

    송상현은 임진왜란때의 절신(節臣)으로 유명하고 송상인은 인조 때 암행어사(暗行御史:왕명으로 특별한 임무를 띠고 지방으로 나가던 임시직의 관리.어사또)를 거쳐 부사(府使:정3품 벼슬)를 역임하고 관찰사(觀察使:종2품 벼슬.감사)등을 지냈다.

    송성명은 예조판서(禮曹判書:예조는 6조의 하나로 예악(禮樂).제사.연향.조빙(朝聘).학교.과거 등에 관한일을 맡았음.판서는 정2품 벼슬.장관).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문명(文名: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높았다.

    송진명은 호조.이조.예조판서(判書:정 2품 벼슬,장관)등을 지내고 청렴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송인명은 좌의정(左議政:의정부 정1품벼슬,정승)에 이르렀으며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다.

    송문재는 관찰사(觀察使;종2품 벼슬,감사).대사헌(大司憲:사헌부의 종2품 벼슬로 현재의 검찰총장).호조참판(戶曹判書:종2품 벼슬로 차관)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정가공파(正嘉公派)에서는 영의정(領議政:정1품 벼슬.정승)에 오른 송 질(宋)과 중종의 부마(駙馬;사위.부마도위의 약자)인 송 인(宋),송문림(宋).송언신(宋) 등이 가문을 빛냈다.

    송 질은 중종반정(正)때 정국공신(臣:조선때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한 중종반정때 공을 세운 103명을 4등으로 구분하여 내린 훈호)으로

  • 영의정(領議政:정1품 벼슬.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손자 송 인은 중종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도총관(管:오위도총부 최고관직인 정2품벼슬로 군무를 총괄하였으며 대개 종실에서 겸하는 경우가 많음)을 지냈으며 시문(詩文)과 서예에 능하였다.

  • 송문림은 성종 때 좌리공신()에 책록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벼슬.장관)를 지냈으며 송언신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벼슬,국방부장관)와 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1년 관찰사(觀察使;종2품 벼슬,감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족보(族譜)를 만들었다고 한다.

  • 정가공파의 근.현대 인물로는 내각수반을 지낸 송요찬장군이 유명하다.

  • 한때 미국의 정보기관은 송요찬장군이 미국병원에 입원 중일때 송장군에게 접근 한국의 주요정보를 캐려했으나 송요찬 장군은 "나를 죽이고 정보를 캐가라"며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을 혼쭐낸것으로 유명하다.

    원윤공파에서는 개성원윤 송 운의 6세손 송 간(宋侃)이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벼슬.법무부차관)을 지냈으며 후에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단종 원년)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등 여러 고명 대신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단종이 물러나자 고향인 여산에서 두문불출하였다.

    단종이 시해되자 그는 산 속으로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김시습.조상치.조여.정지산.이성희.이축. 엄흥도와 더불어 팔절(八節)로 숭상받았으며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과 운곡서원, 숙모전, 세충사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6세손 송건(宋建)은 임진왜란때 공을 세우고 성주 판관이 되었으며 뒤에 함창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殉節:나라위해 목숨을 버림)했다.

    원윤공파에서는 송익필(宋)이라는 거유(巨儒)를 배출했다.

    송익필은 선조 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했다.

    송익필에 대해 일찌기 율곡 이이는 "성리학을 말할 만한 사람은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뿐"이라며 극찬하였다.

    송익필(호는 구봉)은 후진 양성에 노력하여 문하(門下)에 사계 김장생,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정 엽(鄭曄).서 성.정홍명.김 반(金槃)등의 학자를 배출하였고 특히 사계 김장생의 예학에 학통을 잇게 하여 조선시대 예학의 종주(宗主)를 이뤘다.

    여산송씨의 5파 중에서 원윤공파는 전라도 고흥(), 밀직공파는 경상도영덕(), 소윤공파는전북 부안()·익산(), 지신공파는 부안, 정가공파는 경기도에 집성촌이 있으며 지난 2000년 인구조사에서 여산송씨는 총7만 2763가구에 인구는 232,753명으로 송씨의 37%를 차지했다.

    한편 여산송씨족보(礪山宋氏族譜)는 1606년(선조 39)에 송언신(宋言愼)이 편찬하여 1610년(광해군 2) 송일(宋馹)이 청주에서 1책으로 간행하였고 서기 1653년(효종 4)에 송희업(宋熙業)이 보완하여 상.하 2책 226장으로 편찬 간행한 것으로 1991년 4월 경기유형문화재 제 139호로 지정 되었다.

    여산송씨 족보는 본편 외에 추록() 2권이 있으며 시조 송유익() 이하 19대까지 기록되어 있다. 적서()는 구분하였지만 남녀를 구별하지 않았고 출생순서에 따라 기록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중엽까지의 '장자상속제도'를 알수있는 귀중한 문서로 평가된다.

    또한 딸의 후손도 4대까지 기록하였으며 이는 18세기 이후의 족보와 비교할 때 오히려 남녀차별이 덜하였음을 알게 해주며 양자 입양 사실에 관해서도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14대 이후부터 기록되어있어 17세기 이후에 양자제도가 생겨났음을 짐작할 수 있게하는 문헌이다.

    당시 여산송씨 문중의 가족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 족보는 한 면을 세로로 6칸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족보 가운데 17세기 이전의 것으로 큰 가치가 있다.

    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 쓰던 과거로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대과)에 74명,무과(武科)에 51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29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 가지)에 2명 등 모두 35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여산송씨 분묘에서 미이라 발견>

    지난 2004년 대전 보문산기슭 중구 목달동에서 조선초기의 사대부 무덤이 발견되었다.

    여산송씨 분묘인 이곳에서 여산송씨 11세손인 어모장군(禦侮將軍:정3품 벼슬.당하관)을 지낸 송효상(?~1490년경)의 무덤을 비롯 증손자 형제들의 미이라가 출토되었다.

    이들무덤에서는 미이라와 함께 복식유물이 출토되었는데 15세기에서 17세기 초반의 복식으로 여말선초의 복식 특성과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한 복식 특성을 같이 고찰할수있어 학계에 큰 관심을 끌었다.

    송희종은 송효상의 증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 품계)로 군자감판사(軍資監判事:군자감은 조선때 군수품 출납을 맡아본 관청이며 으뜸벼슬은 정(正)으로 당하관임,군량미는 녹미를 포함 30만석을 저장했음)를 지냈고 같이 발견된 순흥안씨는 송희종의 부인이다.또 충주박씨는 송희종의 형인 송희최의 부인이다.송희최는 선무랑(宣務郞:조선때 종6품 하계(下系) 문관의 품계)으로 수 군자감 주부(守 軍資監 主簿:조선때 종6품 낭관 벼슬.수는 계비직고(階卑職高)라 하여 관직의 수급균형을 맞추기위해 도입한 '행수법'이다.즉 품계는 낮은데 관직은 높은 직을 맡았다는 뜻)를 지냈다.

    2009년12월부터 대전광역시 유성구 노은동 소재 <대전선사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출토복식은 대전지역에서 생활했던 기호학파 선비들의 생활상을 엿볼수있어 흥미롭다. 전문가들은 출토복식의 직물을 보면 견직물보다는 면직물이 많다며 이는 임진왜란이후 어려워진 경제사정과 그로 인해 면직물생산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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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달동에서 출토된 복식. 대전 선사박물관(유성구 노은동 소재)에서 전시중.
    사진 위 <답호> 아래 <방령상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여산송씨는
    1985년에는 총 48,212가구에 인구는 200,334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72,763가구에 인구는 232,753명으로 조사되었다.

    <인물 탐구>

    송익필(宋翼弼,1534~1599)

    여산송씨,호는 구봉(龜峰).현승,시호는 문경(文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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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익필 묘갈명 (유명조선국 구봉 송익필 운장지묘)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성리학과 예학에 정통했다고 하며 후진양성에 힘써 송익필의 문하에서 사계 김장생.김집 등 수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로 유명하다.

  • 구봉 송익필은 서출 이라 벼슬은 못 하였으나 율곡 이이.성혼 등과 학문을 논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이산해.최경창.백광홍.최립.이순인.윤탁연.하응림 등과 함께 '8문장가'로 꼽혔으며 시(詩)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서얼 출신인 그는 <서인의 모주>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지략가였다.
    송강 정철의 일급 참모로 조선 중기의 거의 모든 사화(士禍)에는 그의 입김이 작용했다. 선친의 정변(政變) 밀고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했고 형기(刑期)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운장산>에 은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 이름도 그의 자(字)인 운장(雲長)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학자의 은거는 산자락마다 수많은 일화를 낳게했으며 산에 상징들을 만들어 냈다.

    ...."내 뒤에 오는 몇 사람이 나를 앞서 갔는가? 제각기 머물 곳이 있는데 무엇을 다투리요"로 끝나는 구봉의 시 <산행>은 시간을 다투는 현대인들에게 산행의 의미를 깨우쳐주기도 한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맥을 받아 진안고원(鎭安高原)이 솟아 났고,무주.진안.장수 3개 군에 걸쳐 있는 해발 500m의 <운장산>은 북류하는 금강과 남류하는 섬진강의 분수계가 되고 있다. 운장산은 전북 진안고원을 대표하는 진산(鎭山)으로 금남정맥의 전망대라고도 한다.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대둔산. 덕유산.마이산 멀리 계룡산.지리산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구봉 송익필은 고양(高陽)에서 후학양성에 주력했고 지평(持平:사헌부의 정 5품으로 지평의 직무는 정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과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그리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일을 함)에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구봉집>이 있다.

    본관지 여산(礪山)은 전라북도 익산시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이 합쳐진 지명이다. 신라 경덕왕 때는 야산현(野山縣)으로, 서기 940년(고려 태종 23)에는 야산현이 낭산현으로 바뀌었고 서기 1018년(현종 9)에는 전주의 속현이 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여량현이 낭산현을 병합하여 1399년(정종 2)에는 여산현이라 개칭하였다.1436년(세종 18)에는 여산군으로, 1699(숙종 25)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 여양(礪陽)과 호산(壺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1896년 전라북도 여산군이 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여산군이 폐지되고 관할 11개면이 여산면 등 5개면으로 통합되어 익산시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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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자료 지방 및 축문쓰기 file 아펠리아 2011.01.09 8296
42 성씨 우리나라 성씨 본관별 순위 2 아펠리아 2010.05.05 2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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