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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GA-Genea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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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수(宋麟壽 1499~1547 은진(恩津) 인) 우암 송시열의 종 증조할아버지 부끄러움을 안고 살기 보다는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이 났다.
 
여기부괴이생(與其負愧而生)
 
불여무괴이사(不如無愧而死)
 
1499~1547  조선(朝鮮)중기(中期)의 문신(文臣) 본관(本貫)은 은진(恩津) 자응 미수(眉叟) 또는 태수(台叟) 호는 규암(㙓菴)
 
아버지는 건원릉(健元陵)참봉 세량(世良)이다. 진사(進士) 엄용공(嚴用恭) 에게 배웠고 김안국(金安國)에게 지도(指導)를 받았다. 부인은 안동권씨종 증손자가 그 유명한 우암 송시열 1521년(중종16년)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及第)하여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가 되었다.
 
이 때 김안로(金安老)가 권력(權力)을 쥐고 정권(政權)을 우지좌지하자 홍문관(弘文館)의 모든 관원(官員)이 함께 인사행정(人事行政)의 공정(公定)한 실시(實施)를 내세워 김안로(金安老)를 탄핵(彈劾)하였다.
 
이어서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을 겸임(兼任)하고 왕의 특지(特旨)로 충청도(忠淸道) 지방(地方)을 순찰(巡察)한 뒤 공물(貢物) 잡역(雜役)의 폐해(弊害)를 보고(報告)하였다. 
 
 1525년 박사(博士)로 승진(昇進)하고 이어서 부수찬(副修撰) 수찬(修撰)을 거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어 검토관(檢討官)으로서 경연(經筵)에 참여(參與)하였는데 , 육조(六曹)낭관 임면(任免)의 중요성(重要性)을 강조(强調)하였다.
 
그 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 부응교(副應敎)등(等)을 역임(歷任)하면서 당시(當時) 유행(流行)한 사치(奢侈)풍조(風潮)를 배격(排擊)하고 교육(敎育)진흥책을 건의(建議)하였으며, 특히 김안로(金安老)의 재집권(再執權)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그 일파(一派)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濟州)목사(牧使)로 좌천(左遷)되었다.이때 그는 병(病)을 칭탁(稱託)하고 부임(赴任)을 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金安老)일파(一派)에게 탄핵(彈劾)을 받아 사천(泗川)으로 유배(流配)되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 일당(一黨)이 몰락(沒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禮曹)참의(參議)가 되고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을 겸임(兼任)하면서 후학(後學)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 하였다. 이어서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等)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좌천(左遷)되었다.
 
관찰사(觀察使)에 부임(赴任)하여 형옥(刑獄)사건(事件)을 제때에 처리(處理)하고 교화(敎化)에 힘써 풍속(風俗)을 바로잡았으며 교육(敎育)을 진흥(振興)시켜 많은 인재(人才)를 양성(養成)하였다.

특히 조정(朝廷)의 숭유(崇儒)정책(政策)을 받들어 영암(靈岩)에 기영정(耆英亭)을 세우고 학술(學術)을 장려(奬勵)하였다.
 
이때 남평현감 유희춘(柳希春) 무장현감(茂長縣監) 백인걸(白仁傑) 등(等)과 뜻이 맞아 학문(學問)을 토론(討論)하였다.
 
인종(仁宗)이 즉위(卽位)하자 동지사(冬至使)로서 명(明)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윤원형(尹元衡)을 탄핵(彈劾)하였는데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한성부(漢城府)좌윤(佐尹)에 있다가 탄핵(彈劾)을 받고 파직(罷職)당하여 청주(淸州)에 은거(隱居)하여 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性理學)게 밝았고 성리학(性理學)을 보급(普及)하기에 힘썼다.
 
평생(平生)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선조(宣祖)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著書)에<규암(㙓菴)집>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묘소 충북 청원군 문의면 남계리 산 69-3

 
 부끄러움을 안고 살기 보다는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이 났다. 

여기부괴이생(與其負愧而生)
 
불여무괴이사(不如無愧而死)
 
전기의 송인수(宋麟壽 1499~1547)라는 분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아들에게 남긴 말이다.
 
송인수는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명을 전하러 온 사자가 그의 집에 이르렀던 날이 마침 그의 생일이어서 많은 친족과 문생들이 모였는데 그 소식을 듣고는 모두 통곡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놀라는기색 없이 목욕하고 관복을 갖추고서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의 죽음을 괘념치 말고, 부지런히 독서하고 술과 여색을 경계하여 구천(九泉)의 영혼을 위로하라. 부끄러움 안고 살기 보다는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이 낫다.” 죽음 앞에서도 구차하지 않고 초연했던 선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부끄러움 앞에 죽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부끄러움을 초래한 자신의 잘못을 고쳐 새롭게 거듭나야 할 때도 있고, 떳떳한 사람을 부끄러운 사람으로 몰아가는 세상을 바로잡아야할 때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더 이상 부끄러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끝난 자신의 생명력을 억지로 연장하려고 힘에 빌붙어 구차히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을 볼때에 우리는 그를 더럽게 여기고,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에는 분노를 느낀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아는 것이 참다운 선비의 모습일 것이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생사(生死)를 논하는 것이 너무 무거울까?
그럼 진퇴(進退)를 논해보는 것은 어떨까?
 
 
 
※  을사사화 (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文定王后)측의 세력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中宗)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元子) 호(岵)가,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慶源大君) 환(緝)이 각각 탄생하자, 김안로의 실각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득세한 윤원로·윤원형 형제(小尹)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大尹)와의 사이에 대립과 알력을 빚게 되었다.
 
인종 즉위 뒤 정계는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소윤측은 대윤측에 의해 큰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의 즉위와 함께 유관(柳灌)·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에 의해 그 파의 사류(士類)가 많이 등용되어, 기묘사화 이후 은퇴한 사림들이 다시 정권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소윤의 양세력으로 갈라졌다.이 동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으로부터 탄핵을받아, 계자(階資)를 박탈당하고 윤원로 역시 파직된 사건이 생겨, 문정대비·소윤측의 대윤측에 대한 불만과 함께 문정대비의 인종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되었다. 인종이 재위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에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재등용된 윤원로는,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鄭順朋), 병조판서 이기(李),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 單)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瑠,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死賜)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사위인 이덕응(李德應)의 무고로 이휘(李煇)·나숙(羅淑)·나식(羅湜)·정희등(鄭希登)·박광우(朴光佑)·곽순(郭珣)·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健)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벽서가 발견되어, 봉성군 송인수(宋麟壽) 등이 사형,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와,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安明世)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時政記)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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